사랑의 기술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룰 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법 그리고 거기에서 나아가 타인을 사랑하는 법,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덕목들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은 사랑을 대개 어떠한 대상을 만나 한순간에 발현하는 경쾌한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노력의 중요성을 간과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이란 노력으로 얻어야 하는 것이며 사랑을 얻기 위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것들은 사랑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먼저 사람들이 사랑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사랑하는’ 문제로 보기보단 ‘사랑받기’ 위한 문제로 바라본다. 남성의 경우는 남들보다 뛰어난 경제력, 권력을 키우고, 여성의 경우는 외모를 치장하는 방법으로 사랑받기 위해 애쓴다. 또 다른 이유는 사랑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고 대상을 찾기가 어려울 뿐이라고 말한다. 마지막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순간과 사랑하고 있는 순간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두 사람이 순간 벽을 허물고 일체라고 느끼는 순간이다. 이러한 경험은 유쾌하고 격앙된 순간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는 본질적으로 지속될 수가 없다. 한 번 허물어진 벽은 또 다시 허물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랑을 하는 경우에는 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노력에 대해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노력이 필요한 사랑을 왜 자꾸 찾게 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알기 위해서 인간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사람들이 만들었던 말그대로 자연의 상태이던 상관없이 인간은 전체의 일부로서 분리를 두려워한다. 분리는 인간적 힘의 상실을 의미하고 그러한 자각은 불안을 야기한다. 따라서 원시시대에는 동물의 가면을 쓰고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였고 현대사회로 진보하면서 집단을 이루고 국가를 이루며 분리의 상태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진정한 합일은 대인간적 융합에 의해서 발생한다. 하지만 대인간적 융합이 곧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대인간적 합일에는 사랑이 아닌 경우가 있다. 대인간적 융합의 한 종류인 공서적 융합이란 수동적인 대상과 또 다른 능동적으로 지배하는 대상 간의 관계이다. 공서적 합일과 대조되는 성숙한 사랑이란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을 의미한다. 사랑으로 하여금 인간이 느끼는 분리의 감정을 제거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시키는 것 즉, 둘이 하나가 되면서도 둘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를 말한다.
공서적 관계인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가 존재한다. 어머니는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제공하며 이러한 사랑은 ‘자식이 자식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랑은 수동적인 경험이다. 아이들이 사랑에 같는 관심은 사랑을 하는 측면보다는 사랑을 받는 측면에 국한된다. 아이는 성장함에 따라 아버지의 권위와 지도가 필요하게 된다.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이 충족될 때만 주어지기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의 기대에 맞춰서 행동하게 된다. 아버지는 한 아이가 태어난 사회가 던져주는 문제들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쳐 주고 지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따라서 삶에 대한 신념을 갖고, 지나친 걱정을 하지 말고 마침내 아이가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소망을 가져야한다. 마찬가지로 아버지 역시 자신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 스스로 사회가 던지는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지배하는 권위를 가지길 소망해야 한다.
사랑이란 특정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이다. 사랑이 활동이고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만을 찾게 되고 결국 그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태도를 얻게 된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사람이 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은 공서적 애착이거나, 확대된 이기주의일 뿐 사랑이 될 수 없다. 사랑의 태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태도의 기본이 되는 형태는 형제애이다. 이 사랑의 특색은 배타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핵심에 대해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동일성에 근거하여 모두 같은 형제라는 점을 알아채는 것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형제애의 기본이다.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은 모성애이다. 모성애란 자식에게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여 아이의 생존과 보호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보호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긍정적인 측면을 제공함과 동시에 삶에 대한 사랑, 살아감에 대한 즐거움을 알려준다. 결국 아이에 대해 창조자로서 가지고 있던 능력을 포기함으로써 아이가 자신에게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형제애는 동등한 자들 간의 사랑이고 모성애는 무력한 자에 대한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은 한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내 형제 중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내 형제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고, 내 아이를 사랑한다면 모든 아이를 사랑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두 유형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이 성애이다. 성애는 완전한 융합 곧, 다른 사람과 결합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성애에서 중요한 점은 자신을 완전히 타인에게 위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결단과 판단, 약속이다. 이러한 약속을 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보통 자기애가 강한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기심과 자기애는 다르다.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이 받는 데서만 행복을 느끼고 능동적으로 주는 행위를 통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사랑이란 대상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며 사랑을 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교적 형태인 신에 대한 사랑 또한 다를 것이 없다. 신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에 대한 애착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착의 형태로 발달하였다. 초기의 종교는 신에 대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랐고, 이러한 사랑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 있을 때 신의 사랑이 나에게 주어진다는 아버지에 대한 애착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성숙한 신에 대한 사랑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신의 모습을 변화시킨다. 신은 곧 정의이며 진리와 사랑의 원리로 바뀐다. 신은 현상의 다양성의 배후에 있는 통일원리의 상징이고 인간 내면에 있는 정신적인 종자의 꽃이 된다. 따라서 신은 이름을 가질 수 없고 정의할 수 없으며 볼 수도 없는 존재가 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신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 한 것이기 때문에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으로의 변화가 된다. 동양에서 이러한 관점은 중용으로 발전하였다.
자본주의에서의 사랑은 붕괴되었다. 노동자들은 공장의 부속품으로 능동적으로 자신의 행동을 실행하지 않고 사회의 요구에 맞춰 수동적으로 행동을 하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 결혼의 형태도 일종의 ‘팀’으로 변화하게 된다. 남녀는 결혼하여 서로에게 합일하지 못하고 남남으로 남게 되며 서로를 위안하며 호의를 가지려는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속에서 고독감을 느끼지 않으려는 ‘두 사람만의 이기주의’를 사랑과 친밀감으로 오해한다.
또 남녀간의 사랑에서 신경증적으로 여겨지는 사랑의 형태가 발생한다.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 어버이상에 대한 애착을 성인이 되어서도 느끼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어머니, 아버지 상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배우자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자신이 능동적으로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랑과 인간적 합일이라고 볼 수 없다.
올바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들이 요구될까? 사랑의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마찬가지로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은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훈련을 할 때는 정신집중이 필요하다. 훈련과 정신 집중의 요소외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의 산업은 빠른 것 만을 원해 인내를 갖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훈련에는 인내가 동반되어야 발전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요소는 최고의 관심이다. 관심이 없을 때 훈련은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을 성취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은 것이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 즉, 자기 자신의 세계에 빠져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 세계는 자신의 공포와 욕망의 실재뿐이다. 이러한 자아도취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합리적 신앙을 말한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자신에 대한 확실성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창조적 행위는 합리적 신앙에 의해 시작되고 합리적 신앙 자체는 이전의 상당한 연구, 경험, 반성의 소산이다. 사람이 신앙을 갖는 다는 의미는 확실성을 갖는 다는 의미 말고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형태는 어머니가 갓난아이데 대해 갖는 신앙 즉, 아이가 성장하고 이야기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러한 신앙은 인류에 대한 신앙에서 절정에 이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없이 자기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불러일으키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사랑하는 행위)는 신앙의 작용이며, 신앙이 없는 자는 사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나에게 되게 어려운 책이었다. 사랑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었으며 특히 남녀사이의 사랑은 정말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며 특별한 노력없이 이뤄지는 사랑이라 생각하였다. 흔히 말해서 사랑은 자연스럽게 찾아오고, 사랑이 찾아오고 난 이후의 관계에 대해서만 노력하면 사랑을 지속되며 깊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예전에 만났던 여자친구와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곤 내가 거짓된 꾸밈없이 내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던 것뿐이다. 그 이후로는 새로이 만나고자 했던 모든 이성들과 잘 이어지지 못했는데 아마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 잘 안됐던 것 같다. 사실 자신의 모습에 확신을 가지고 드러내기란 점점 나이가 들면서 어려워지는 것 같다. 사랑의 기술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나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인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나의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나에 대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그렇다면 나에 대한 확신은 어떻게 하면 기를 수 있을까? 아마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용기란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나에 대해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던 상관없이 나의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기를 가지고 나 자신을 더욱 드러내면서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러한 확신이 믿음이 된다면 또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잘 드러낼 수도 있지 않을까?
요새 육아에 대한 책에 관심이 많다. 사실 아직 결혼할 나이도 아니고(사회적인 규범에 의하면) 아이를 낳으려면 정말 많은 시간이 남았는데 왜 육아서적에 관심이 많은가에 대해 생각해봤다. 책에 의하면 아버지가 바라는 조건에 맞춰서 아이는 조건을 충족하고 사랑을 받으려 한다.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특성 때문에 아이는 아버지의 모습을 따라간다. 따라서 내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이 아이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될 거란 생각, 그리고 그 모습이 나의 모습을 대변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이런 생각이 내가 벌써부터 육아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인 듯하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사랑은 정말 생물학적인 성에 고정되는 것일까? ‘게이’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들은 과연 아이를 입양하여 혹은 대리모를 통하여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줄 수 없는 것일까?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물 또한 어머니의 사랑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의 새끼에게 제공한다. 그 중 황제펭귄의 경우에 어머니는 알을 낳고 금세 수컷에게 자식을 건네 준 후 먹이를 찾아 바다로 떠난다고 한다. 수컷들은 자신의 발 위에 알을 올려놓고 부화할 때까지 64일이나 견뎌낸다고 한다. 이러한 행위는 새끼의 생명의 보존과 안위를 무조건적으로 제공하는 어머니의 사랑이다. 이런 것처럼 사람의 경우도 생물학적 성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그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이 각자의 역할에 맞게(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적절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인간과 모든 자연속에 존재하는 생물은 자식에 대한 모성애 그리고 부성애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 같다. 물론 정도의 생물학적인 성에 어느정도 영향은 있다 할지라도.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왜 사람들이 예수에 열광하고 미쳐 있으며 또 승려들은 득도에 이르려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란 안 좋은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한 원인은 아마 그러한 사랑이 성숙하지 못한 신에 대한 사랑에 근거를 두기 때문인 듯하다. 신이란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정의, 곧 진리의 존재이다. 하지만 속된 말로 개독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신을 함부로 정의하고 믿으라 말한다. 그리고 신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과연 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신은 말할 수도, 볼 수도 없는 존재이므로 신과의 합일을 통해서만 신의 존재를 알 수 있다. 즉 올바른 행동으로의 변화만이 신과의 합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점은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의 경지에 오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은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기에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물론 신에 대해 추측하는 자체도 신을 완벽하게 알 지 못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러한 과정을 거치며 신이란 무엇인지 알아갈 수 있고 따라서 그러한 일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중용의 상태가 중요한 것이다. 불교에서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중용의 자세이고 신과의 합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부족한 것이, 즉 성숙하지 못한 사랑을 행하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에 사이비와 잘못된 신에 대한 사랑이 판을 치는 이유인 것 같다.
나는 결론적으로 사랑이란 사랑의 기술 책과 마찬가지로 자신에 대한 믿음이 기초되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존재해야만 누군가에게 자신이 소중하다고 느끼는 것을 줄 수 있고 상대방이 그러한 행동에 대해 진심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남녀와의 관계를 넘어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기초되어야 한다. 즉, 이 책에서 중요하게 말하는 자기애가 중요한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믿으며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주는 영향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이다. 혹여 자신이 진심을 다해 주었던 사랑을 상대가 거부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으면 자신의 믿음이 손상 받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앞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신을 진정으로 믿고 있는지, 진심으로 사랑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랑의 기술 책은 친구가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제가 쓴 거 아님
By 송범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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